최근 유럽 근대 미술에 한 획을 그은 거장들의 작품이 국내에서도 다수 전시되고 있다. 겨울방학을 맞아 아이들의 예술 특히 미술에 대한 시선을 넓혀주기에 좋은 기회다. 하지만 정작 전시장을 찾으면, 전시장 내의 엄숙한 분위기와 어려운 명화들에 아이들이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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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전 어린이 박물관 입구

이러한 아이들을 위해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전>에서는 ‘어린이 박물관’에 특별한 코너를 준비했다. 어린이 박물관 내부에는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이야기를 아이들이 알기 쉽도록 풀이해 놨다. 아직 명화가 어려운 아이들에게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작품 세계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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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박물관 내부

또한 ‘모딜리아니와 잔느에게 편지쓰기’라는 체험 이벤트도 함께 진행 중이다. 아이들에게는 일반 전시장과 어린이 박물관에서 작품을 관람한 직후에 바로 자신들이 느낀 점을 정리하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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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에 쓴 아이들의 편지(포스티잇)로 만들어진 나무

작품 보호와 보안상의 이유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는 일반 전시장과 달리 어린이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이 허가된다.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사진은 물론 두 사람의 주요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내부 디자인이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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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와 잔느에게 편지를 쓰는 아이들



이번 주 중에 한가한 시간을 골라 <모딜리아니와 잔느전>을 아이들과 함께 찾아서, 명화도 감상하고, 사진으로 기분 좋은 추억도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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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입구에 있는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대형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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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1 22:26 2008/01/21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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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의 초상>

폴란드 출신의 시인이었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는 유학을 위해 파리에 왔지만,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으로 화상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폴 기욤의 소개로 처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만났다. 당시 파리에서 가장 수완이 뛰어난 화상 중에 한명이었던 폴 기욤은 아직 신인작가였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직접 관리하지 않았고, 즈보로프스키를 통해 파리의 화단에 데뷔시킨다. 폴 기욤이 메이저리그 선수 매니저였다면, 즈보로프스키는 마이너리그에서 유망주를 키우는 메니저였던 셈이다.

즈브로프스키가 파리에서 화상으로 활동할 무렵, 이미 파리에서는 '근대화의 아버지' 폴 세잔과 '물랑루즈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 그리고 ‘풍경화의 대가’ André Derain이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즈브로프스키는 폴 기욤을 비롯한 선배 화상들의 소개로 만난 모딜리아니, '인상주의 대가' 샤갈과 그리고 André Derain의 그림을 주로 취급했다. 즈브로프스키는 당시로서는 적은 돈이 아닌 500프랑의 돈을 모딜리아니에게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계약서가 아닌 신의로 맺어진 이 약속은 곧잘 지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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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생전 모습


하지만 즈브로프스키에 대한 모딜리아니의 신뢰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딜리아니는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니스 시절에 즈브로프스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으며, 종종 그림이 완성되었는데 마음에 들어서 팔고 싶지 않다는 유머러스한 편지를 즈브로프스키에게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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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한나 즈보로프스키의 초상>

또한 모딜리아니는 즈브로프스키와 그의 안내 한나 즈브로프스키를 모델로 여러편의 드로잉과 유화를 제작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드로잉 속 즈브로프스키는 날렵하고, 시원한 외모를 가진 남성으로 묘사된다. 또한 당시 파리의 가난한 화가들을 따뜻하게 대했던 한나는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서는 일종의 ‘여신’과도 같은 이미지로 그려졌다.

하지만 즈보로프스키는 오늘날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가장 많이 취급한 화상이자, 동시에 위작을 양산한 범죄자로 지탄받고 있다. 그는 모딜리아니가 니스에서 돌아온 후 건강 상태가 급격이 악화되자 경제적 지원을 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즈브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 사후 그의 그림 가격이 폭등하자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다른 작가를 시켜 덧칠하는 수법으로 많은 '위작'을 탄생시킨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선의로 시작해, 우정으로 이어진 관계였던 모딜리아니와 즈브로프스키. 하지만 친구의 사후에 경제적 욕심에 눈이 먼 즈브로프스키는 결국 빛바랜 우정 보다는 경제적 실리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딜리아니를 직간접적으로 후원했던 거물급 화상인 폴 기욤이 최초로 개인 컬렉션에 기반한 박물관(오랑주 박물관)을 만들어 낸 것에 비한다면, 즈보로프스키의 선택은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평범한 화상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고 하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오는 3월 16일(일)까지 고양 아람누리에서 열리는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전>에서는 모딜리아니가 그린 레오폴드 즈브로프스키를 모델로 한 드로잉으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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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0 15:53 2008/01/2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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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의 실제 모습


모딜리아니 전시장에 처음 들어서면 마주치는 작품이 바로 모딜리아니가 그린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Beatrice Hastings)의 초상화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 연상이었던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는 모딜리아니를 만났을 당시 이미 인정받는 시인이자 유명한 저널리스트였다.

헤이스팅스의 기억에 의하면 처음 모딜리아니를 만난 것은 1914년 프랑스 파리에 있는 한 카페였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화가로써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가는 단계였다. 당시 헤이스팅스는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파리에 형성되었던 보헤미안 그룹에 막스 자콥의 소개로 합류했다.

파리에서 만난 모딜리아니와 헤이스팅스는 곧 사랑에 빠진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매료 되었을 것이다. 외삼촌의 죽음으로 가난한 생활을 연명하던 모딜리아니는 헤이스팅스의 아파트로 주거지를 옮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연애는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불같은 성격의 헤이스팅스가 자신과 연애를 하는 도중에도 멈출 줄 모르는 모딜리아니의 여성편력을 못마땅해 했기 때문이다. 사실 모딜리아니의 친구들도 모딜리아니와 헤이스팅스의 만남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포도주와 같은 도수가 약한 술을 즐기던 모딜리아니가 헤이스팅스와 만나면서 독한 술(보드카)을 즐겨 마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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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가 그린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의 초상>

헤이스팅스는 파리에서 주로 Emily Alice Haigh라는 이름으로 작가활동을 했지만, Beatrice Tina, D. Triformis등 몇 가지 예명을 가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파리는 물질적 풍요와 시각적 화려함으로 가득했지만, 보수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인 분위기 역시 팽배해있었다. 때문에 진보적인 성향의 정치 칼럼니스트였던 헤이스팅스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안전하게 발표하기 위해 다양한 필명을 사용해야 했다.

헤이스팅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여류작가가 바로 <독일의 하숙에서>라는 소설로 유럽에서 인기를 얻었던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이다. 맨스필드는 여성 특유의 감성과 섬세한 스타일이 돋보이는 여러 편의 소설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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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스팅스의 영향을 받은 여류작가 '맨스필드'


여기서 잠시 모딜리아니와 헤이스팅스의 연애를 돌아보자. 모딜리아니는 잔느와 만나기 6개월전 헤이스팅스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그때까지 모딜리아니는 헤이스팅스를 모델로 약 10여점의 유화와 드로잉을 제작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잔느가 모딜리아니를 만나기전 이미 헤이스팅스와 교류가 있었다는 점이다. 실로 상반된 성격을 가진 두 여인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비록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헤이스팅스의 애인이었던 모딜리아니에 대한 이야기도 분명히 나누지 않았을까?

모딜리아니와 헤어진 뒤에도 헤이스팅스는 조국 영국에 남아있는 보수적인 왕권을 비판하는 잡지 <The Old New Age>를 창간해 발표한다. 이쯤되면 그녀는 이미 여걸을 넘어 여전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불행이 그녀를 덥쳤다. 흡연과 독주를 즐긴 대가로 암에 걸린 것이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헤이스팅스는 1943년 가스 자살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스스로 마감했다.

헤이스팅스는 연애기간중 모딜리아니에게 독주를  전수(?)해 그의 생명을 깎아먹은 원흉으로 지탄받아왔다. 하지만 아직 풋내기 화가였던 모딜리아니에게 '화가도 작가'라는 자존감을 심어주고 동시에 그의 예술적 가능성을 키워준 것 역시 헤이스팅스가 남긴 업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전>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작품인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의 얼굴 초상화>는 전투적이고 격렬한 삶을 즐겼던 그녀의 특징이 고스란힌 담겨있다. 실제로 그녀의 초상화를 만나보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 전시회 티켓을 예매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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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6 10:00 2008/01/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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